악녀의 재구성

악녀의 재구성

  • 자 :홍나래, 박성지, 정경민
  • 출판사 :들녘
  • 출판년 :2018-01-10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8-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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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賢母)도, 양처(良妻)도, 열녀(烈女)도, 효녀(孝女)도 아닌 옛 여인들이 있다. 지식인-남성이라는 필터를 거쳐 살아남은 옛 서사 속 여자들을 조명해보려는 시도는 계속되었으나, 그런 시도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했던 기묘하고 일그러진 여인들이다. 아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귀신에게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고 받아치는 어머니라든가, 양성인(兩性人)이라는 혐의를 받는 여장남자를 옆에 끼고 사는 사대부 여인의 모습은 이 시대의 눈으로 보아도 어딘가 불편하다. 비정한 어머니라거나 음탕한 여자라는 비난을 받기 딱 좋은 인물들 아닌가. 고전문학을 공부한 세 저자(홍나래?박성지?정경민)는 이 여인들의 마음자리에 주목하고, 그들에게 덧씌워진 이데올로기를 하나씩 지워낸다.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고 그 마음의 속살을 들여다봤을 때 남은 것은 순수한 ‘욕망’이었다.







이야기로 살아남은 기묘한 여자들에 주목한다

마음속 욕망을 따라 움직인 그녀들은 어쩌다 악녀(惡女) 혹은 음녀(淫女)가 되었나?

우리에게 익숙한 옛사람들, 특히 옛 여인의 이야기들이란 이런 것이다. 현명하고 어진 어머니, 남편의 출세를 위해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내조의 여왕’, 남편을 먼저 보내고 수절하는 열녀, 또 효부, 효녀……. 후대에 귀감이 되는 여인들의 이야기는 지식인, 즉 남성이라는 권력과 가부장 체제라는 이데올로기를 거쳐 살아남은 것들이다. 당대의 지식인이나 사대부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이야기 속 여성들은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덕지덕지 뒤집어쓴 채 입에서 입으로, 혹은 텍스트의 형태로 이어졌다. ‘딸이여, 이런 여인이 되거라. 현모, 양처, 열녀, 효녀…….’

특별히 당대의 이데올로기에 들어맞는 여인상은 아니었다 해도, ‘시대’라는 필터를 감안하고도 훌륭했던 여자들의 이야기 또한 살아남았다. 이런 방식으로 옛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한 이들은 당대에 남성 못지않은 역량과 지혜를 가졌던 여인들의 현명함, 지략, 인내심, 인품, 강인함을 강조했다. ‘이들은 이렇게 뛰어난 여인이었으나, 시대를 잘못 타고나 불운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으니…….’



옛 여인들의 이야기를 즐겨 소비하는 방식이란 위의 두 가지가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위의 두 가지 분류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속 여인들은 (이데올로기를 거스른) 악녀(惡女) 취급을 받거나 음담패설의 대상이 되었다. 이십 년간 동문수학해온 세 연구자(저자 홍나래, 박성지, 정경민)는 이런 ‘악녀’에 주목했다. 아름답지도, 지혜롭지도, 고고하지도 않은 일그러지고 기묘한 여자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곰나루 전설’의 곰 여인은 인간 남성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자 그 남성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들을 죽인다. 모성(母性)은 어디로 갔는가? 도망치는 인간 남성 앞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아이들을 죽일 거라 협박하는 곰 여인은 잔인한 어머니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인간 남성을 납치해 동굴에 가둔 이 여인은 어떻게도 정당화할 수 없는 악녀 아닌가. 이 지점에서 저자들은 여인의 마음속 욕망을 들여다본다. 여인의 욕망은 남성을 향해 있었다. 모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순수한 욕망, 남자를 얻고 싶은 욕망(사랑), 그뿐이다.

일견 뛰어난 모성의 소유자라고도 보이는 양사언의 어머니가 ‘모성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자. 양사언의 어머니는 서얼인 아들이 적자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남편의 관 앞에서 자결한다. 자식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은 ‘희생 서사’의 아이콘이라 할 만하다. 역사 속 양사언(1517~1584)은 한석봉에 비견되는 서예가이자 여러 지역의 수령을 지낸 청렴한 관리였다. 그렇다면 사대부임이 분명한데, 설화 속 양사언은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적자의 지위를 획득한 서자로 그려진다. 과연 양사언의 어머니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 목숨을 버린 모성의 소유자였을까? 아니, 일단 ‘모성 이데올로기’를 벗겨내고 나면 남는 것은 ‘신분 상승’을 향한 욕망이다. 변방의 평민 소녀였던 여인은 우연히 집에 들른 지체 높은 양반(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의 눈에 들어 양반가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 다음에는 자결로써 아들에게서 서얼의 흔적을 지우고 ‘양반의 어머니’로 남았다.

이 여인들의 마음속에 자식을 위하는 모성이 아니라 남성을 향한 욕망 따위는 없었노라고, 아들의 출세를 위해 희생하는 모성이 아니라 본인의 신분 상승을 갈구하는 욕망 따위는 없었노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야기란 읽는 사람이 읽고 싶어 하는 대로 그 속살을 드러내는 법이다. 모성 이데올로기를 성공적으로 지워내고 그 여인들의 마음속에 남은 욕망에 집중했을 때 읽히는 이야기의 모습이란 이렇게 낯설다. 세 저자들이 마음속 욕망에 집중하며 벗겨내는 이데올로기의 껍질은 모성(母性)을 시작으로 양처(良妻)와 열(熱)로부터 탈주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데올로기는 말한다. 그녀는 훌륭한 어머니였노라고.(혹은 아내였노라고.)

하지만 모성 ? 양처 ? 열로부터 탈주해 다다른 곳은…

그렇다. 일단은 이들에게 독하고 집요한 ‘욕망’이란 것이 있었다고 인정해야 한다. 가부장 체제 아래에서 남성의 부속물처럼 살아갔던 옛 여인들의 욕망을 인정하는 일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마음의 속살에서 엿보이는 욕망을 인정하고 나면 그 마음자리에 남는 것이 있다. ‘주체성(subjectivity)’이란 비록 근대적인 서양학문을 빌려 와서야 우리에게 분명해진 말이고, ‘여성주체성’이란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은 시대의 여인들을 대상으로는 논의가 불가능한 말이겠으나 이 책의 저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여성들이라고 자기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겠는가? 그들은 여성이 굳건한 언어로 삶의 의지를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탓에 ‘내 팔자가 이러하네’ ‘내 복이 여기까지인가 보네’ 하며 더 거대한 의지를 가진 것 같은 운명에 몸을 맡기는 듯 살았을 뿐이다. 이렇게 옛 여인들과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에서 이데올로기의 표피를 벗겨내고 나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속살은 바로 그들의 순수한 욕망, 팔자나 복이라는 말로 형상화된 주체성 그리고 소용돌이치듯 솟아나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이다.



‘여성주체성’은 근대 이후,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말이 아니다.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전근대에도 여성은 온갖 억압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기 삶을 개척해내는 굳건한 내면과 이를 표현해낼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질문한다. 오, 이런! 우리에게 그들의 소리를 들을 귀가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주체성’이라고 말하지 않고 ‘복’이나 ‘팔자’라고 했다.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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