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인본주의자에서 선 수행자가 되기까지 당대 최고의 선사들에게서 배운 수행의 기록
《출가 10년 나를 낮추다》는 1975년에서 1985년까지 10년간 한국에서 구산 스님 문하에서 출가 수행자로 지냈던 마르틴 배철러의 삶과 수행의 기록이다. 2006년 미국 시라큐즈 대학출판부에서 Women in Korean Zen: Lives and Practic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던 것을 서울대 철학과 조은수 교수가 번역하여 웅진뜰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가 한국에서 만나 오랜 인연을 이어간 선경 스님(1903-1994)의 일생이 담겨 있다.
회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던 프랑스 여자를 바꾼 “하심下心”
저널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품었던 18살의 어린 배철러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것은 우연히 친구 집에서 읽은 《법구경》이었다. 사회의 모순에 분개하며 ‘나는 어떻게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어떻게 모든 사람이 더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어린 소녀는 그 책을 읽고 ‘세상을 바꾸려 하는 것보다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2세 되던 1975년에 아르바이트로 모은 5백 달러 상당의 돈을 가지고 무작정 아시아로 여행을 떠난 배철러가 운명처럼 비구니가 된 것은 그의 말괄량이 같은 성품을 잠재워주고, 치닫는 구도의 열정을 품어주신 구산 스님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님조차도 딸이 승려생활에 성공할지에 대해서 아주 회의적이었다. “네가 비구니가 된다고? 절대로 못해. 그러기에는 너는 너무 독립적이야.”(68쪽)라고 편지를 쓸 정도였다. 처음 그는 한국 선방의 참선 스케줄은 열심히 따랐지만 공동으로 울력을 한다든지, 대중들이 모임을 한다든지 하면 늦거나 참석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혼자 산보를 하거나 강가에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화합을 깨는 것임을 알고, 아주 서서히 온 노력을 다하여 자신을 맞추어가기 시작했다. “만일 나이 드신 스님이 비질을 하고 있으면 젊은 내가 바로 그 빗자루를 받아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그분들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그렇게 모든 시간을 다 바쳐서 뛰어 다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길에 낙엽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실천한다면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68-69쪽)”
“서양에서 자라 궁지에 몰릴 때 말을 잘해서 난처한 자리를 모면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나는 나를 변호하기 위해 하던 ‘그렇지만’이라는 말 대신 ‘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참회합니다’라는 말을 먼저 배워야 했다. 그러면 모든 일이 다 용서되고 잊혀졌다. 완전한 용서를 경험한 것이다. 한국의 선방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기를 낮추는 것, 즉 하심下心은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렇게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쉽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스님들이 서로서로에 대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받아들여 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보고 깊이 감동을 받았다.(70-71쪽)”
그가 한국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은 전혀 다른 문화와 사회 속에 들어가서 명상수행을 하고 종교적인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자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발견해가는 긴 여정을 의미했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비구니 수행, 그 구체적 기록
참선을 한다고 오래 앉아 있어 본 적도 없고 비구니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던 그가 출가하여 10년 동안 제방 선방을 편력하며 수행에 전념하는 동안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척박한 수행환경 속에서도 사회적 명성이나 영화와는 관계없이 묵묵히 산중에서 수행의 길을 가고 있는 비구니스님들의 존재였다. 그중 한 분인 노장 비구니스님과 특히 깊은 인연을 나누게 되었으니 그분이 바로 선경 스님이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의 2년 동안 저자의 은사스님인 선경 스님은 마르틴 배철러에게 자신의 인생역정을 털어놓으셨고 그는 그것을 충실히 기록하여 이 책에 담았다. 전통 한국과 근대적 한국, 그리고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의 시기를 모두 경험하셨던 선경 스님의 이야기와 경험은 서양에서 온 20대의 마르틴 배철러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가슴속에 큰 울림을 준다. 가난한 삶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깨달음에 대한 강한 열망과 끊임없이 도전하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스님의 수행열정 때문이다. 선경 스님을 비롯하여 숨겨진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의 삶을 가까이서 본 마르틴 배철러는 깨달은 여성으로서의 한국 비구니스님들의 모습을 온전히 우리에게 들려준다.
★★★
안타깝게도 비구니 수행전통과 생활은 최근까지도 외부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불교의 수행전통을 보존하겠다는 일념은 강하지만 외부에 자신을 노출시키거나 개인적 개성과 능력을 나타내기를 꺼리는 비구니스님들의 은둔성은, 비구니 전통이 한국에서 1700년 동안 계승된 저력이 되었겠지만, 치열한 비구니 수행전통의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게도 만들었다. 이 점에서 이 책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은 과거 비구니의 삶과 그 역사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연구 자료가 된다.
“배철러의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자신과 선경 스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출가자들의 삶과 수행의 기록이지만, 한국불교를 여성의 역사, 여성의 관점에서 새로이 조명해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저술이다. 더구나 한국의 비구니와 그 수행전통을 소재로 할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수행전통의 살아 있는 모습을 생생히 묘사하여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역자가 미국 미시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을 때 한국불교학 과목의 교재로도 썼던 책이다. 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 교수들이 이 책을 대학의 불교 관련 과목의 교재로 쓰고 있다. 대부분의 유수한 미국 대학에는 불교학 입문이라는 수업이 개설되어 있고 수백 명의 학생들이 수강하고 있다. ‘한국불교’를 가르칠 때 원효나 지눌 등 학승의 사상과 철학을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한국의 살아 있는 수행전통과 그러한 수행전통을 담지해가는 무명의 무수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배철러의 이 책은 한국불교를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 알리는 몇 안 되는 영문 책의 하나였다. 수업 도중에 미국 학생들은, 교육도 많이 받지 않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여 수행에 전 인생을 바치는 20세기 초엽의 한국 비구니스님들의 모습에 대해 읽으면서, “도대체 도를 얻는다는 것이 무엇이기에!”라며 감탄하였다.”(〈역자 후기〉 중에서 210-211쪽)
현재 구족계를 받는 비구니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은 한국 외에 중국, 대만, 베트남뿐이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오랫동안 불교가 사라졌다가 최근 부활한 것이고, 대만은 역사가 칠십 년밖에 되지 않으니, 천칠백 년 역사를 가진 한국 비구니 수행전통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