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살아 있고,
자신을 표현하며,
일상의 삶 위에 녹아 있다.”
프랑스인 만화가, 서울을 그리다!
한곳에 오래 머물며 시간을 보내면 여행도 어느덧 일상이 된다.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 낯선 음식, 낯선 냄새 등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일상을 살게 된다. 현명한 여행자라면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때이다. 하물며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이라면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장소에 감흥을 느끼기는 어렵다.
인구 1,000여만 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 서울. 서울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서울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이다. TV, 영화, 심지어 소설이나 노래 가사에도 서울이 인용되고 소비된다. 강남은 가수 싸이 덕에 전 세계로 알려졌을 정도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서울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필히 외국인일 것이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해진 서울을 낯선 시선으로 그린 프랑스 만화가가 있다. 스위스와 국경이 맞닿은 프랑슈콩테 지역에서 태어난 아랍계 프랑스인 사미르 다마니(Samir Dahmani)이다. 리옹에 있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다 앙굴렘에 있는 유럽고등이미지학교(?cole europ?enne sup?rieure de l’image d’Angoul?me)로 옮겨 만화를 공부한 전력이 이채롭다.
저자 사미르는 앙굴렘 유럽고등이미지학교에서 만화를 공부하는 동안 한국 유학생들을 만난다. 당시 저자는 우연찮게 한국 음식을 맛보게 되는데, 이후 이 음식의 향기에 사로잡힌다. 바로 떡볶이의 향기였다. ‘떡볶이의 향기는 일종의 유령과 같아서 나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후각을 통해서만 정확히 인지’하였다고 말한다. ‘음식을 맛보았던 경험은 비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향하는 길’, 즉 한국 문화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어느덧 저자는 ‘향기의 유령이 내게 주었던 속삭임을 더듬어 떠올려 가며’ 한국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자의 그림을 보고 주변 지인들은 저자가 한국을 여러 차례 가보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저자는 ‘한국에 대해 풀어낸 부분을 단지 우연으로’ 남기지 않고, ‘직접 눈으로 본 것을 나만의 방식대로 소화하고’ 싶어 한국으로 떠나고자 했다. ‘내가 이야기하고 그린 것들이 보다 실제로 느껴지고 더욱 풍요’로워지길 바랐다.
저자의 바람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주관한 해외만화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해결해 주었다. 프로그램 공모에 붙어 약 두 달 동안 한국에 머물 기회를 얻은 저자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공부하며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특히 한국의 전통 탈, 그중에서도 ‘말뚝이’에 주목하였다. ‘시각적 풍요와 다양한 의미를 프로젝트에 녹여 내기’로 한 것이다.
《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에 등장하는 유령 같은 존재는 말뚝이탈을 쓰고 있다. 낯선 거리와 사람들을 관찰하는 저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역시 말뚝이탈을 쓰고 있는 인물은 저자의 차기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이방인으로서 서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저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탈을 쓰고 스스로 낯선 인물이 되어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거리와 풍경 들을 낯설게 바라본다.
저자는 서울의 거리, 골목, 풍경과 함께 무엇보다 서울 사람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묘사한다. 그의 그림과 글들을 보다 보면 그동안 몰랐거나 스쳐 지나갔던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이 우리에게도 낯설게 다가오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너무 익숙해서 외면하거나 무시했던 공간이 한 이방인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의미를 다시 부여받는다.
당연함이 낯설어지는 순간 우리는 사고의 전환, 의미의 재배치를 이룬다. 전환되고 재배치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묘한 기시감이 머릿속을 살금살금 간지럽게 한다. 《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가 주는 최고의 즐거움은 ‘일상에 엉큼하게 숨어 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자연스런 행동 변화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