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여종에서 저 높은 왕비까지
산골 촌부에서 한양 마님까지
10대 소녀에서 여든 할머니까지…
남성들의 나라에서 한평생을 살아내고
때로는 경이롭게 운명을 넘어선 여자들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조차 버거웠던 시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취를 남긴 52명의 조선 여성이 있었다. 《또 하나의 조선》은 신분상으로는 밑바닥 여종에서 왕비까지, 지역으로는 남녘 산골 촌부에서 한양 마님까지, 나이로는 10대 소녀에서 여든 할머니까지, 정사(正史)라고 하는 실록이나 양반 남성의 문집으로 구성되는 조선 ‘너머’의 조선을 담았다. 조선이라는 역사 공간에서 여자로 살았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조선 여성들의 일반적인 삶’이란 착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렇듯 그들 또한 각기 다른 환경과 맥락 속에 놓인 감정과 욕망의 주체였다. 특정한 유형이나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존재였다. 장희빈, 대장금, 황진이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들을 비롯해 ‘음란하고 아름다웠던’ 낙안 김씨, 당대에선 드물게 여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담긴 성장기의 주인공 숙희, 마을을 돌며 근심을 위로했던 무녀(巫女) 추월, 상속받은 액수의 세 배로 재산을 불린 ‘자산 관리의 달인’ 화순 최씨 등 시대의 한계와 인간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여성들의 다채로운 서사가 《또 하나의 조선》을 이룬다. 그 서사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조선이라는 사회의 정신과 만나는 동시에 도도히 흐르는 인간 근원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인 저자 이숙인은 〈한겨레〉에 2년간 연재했던 [이숙인의 앞선 여자]를 묶고 보강한 이번 책을 통해 말한다. “자료가 남아 있어도 주목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사소한 기록 하나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었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 책은 짧게나마 기록에 남은 자들을 통해, 소외되었던 여자들을 기억하려는 시도이다.”
성녀도 마녀도 아닌 ‘한 인간’의 자취,
그 다채롭고 도도한 힘을 만나다
이 책의 1부 ‘구체적으로 살고 입체적으로 존재하다’는 자신의 운명 안에서 나름대로 개성 있게 살았으나 ‘시대가 주목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여겨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일례로 경북 지역에서 칠십여 생을 살다 간 신천 강씨는 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점잖게 박제된’ 양반가 여성의 이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첩을 들인 남편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강씨의 목소리는 500년 전을 살던 한 여성의 솔직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날것 그대로 전한다.
“뒤로 갈수록 편지의 내용은 과격해진다. ‘오로지 그년에게 붙어서 당신 것을 맡기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싶구나. 아마도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니 속절은 없다.’ 강씨는 또 자신의 서러운 뜻을 남편과 자식이 모르고 있고, 또 늘 용심이 나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이 사족 마님은 품위를 지키느라 무심한 척 애를 쓴다.”_23쪽
사족 이문건가의 여비(女婢)였던 춘비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35세 전후에 몸에 종기가 퍼지기 시작해 두 달 만에 숨을 거둔 그녀를 ‘주인’ 이문건은 살려보려 애쓰며 시시각각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적어둔다. 사극에서 노비들은 그저 충직하거나 말이 없고 기록에서도 보통 소유주의 물목에 불과한데, 이문건의 시선에 담긴 춘비는 투병 중 ‘소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근원의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이문건의 ‘기록벽’ 덕에 존재의 흔적을 남기게 된 여성들이 이 책에 여럿 등장한다. 신분을 넘어선 인간 유대의 가능성을 보여준 춘비를 비롯해 또 다른 여비 돌금과 향복, 이문건이 30년간 쓴 일기의 여자주인공인 아내 김돈이, ‘단골’로 거래했던 무녀 추월, 애지중지하던 손녀 숙희 등이다. 이들을 연결하는 이문건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우리가 과거의 인물을 불러낼 때 ‘하나의 틀’에 가두지 않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준다. 사족 남성 이문건은 자상한 남편이자 손녀·손자를 살뜰하게 보살피고 훌륭하게 길러낸 조부인 동시에, 노비를 부릴 때는 누구보다 매정하고 심지어 어린 여비를 강간하기까지 한 사내다. “이러한 이중성에 더하여 자기 주변의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에 관한 가장 진지한 기록을 남긴 소중한 자료원”(7쪽)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 속 인물을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은 2부 ‘성녀와 마녀의 프레임을 넘어’에서도 돋보인다. 허난설헌, 대장금, 논개 등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여성들도 낯선 맥락 속에 배치될 때 기존의 도식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난다. “우리의 삶이 인과적 순서를 밟아 계획대로 펼쳐지지만은 않듯, 이들의 삶도 우연과 필연의 길항 속에서 어둠과 밝음이 교체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6쪽) 황진이는 남성의 시각으로 재단되어온 ‘사랑의 화신’이나 ‘성녀(聖女)’ 같은 상징을 벗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거듭난다. 저자는 또한 우리에게 폐비 윤씨로 더 잘 알려진 제헌왕후가 ‘현숙한 왕비’에서 도저히 중전 자리에 둘 수 없는 악녀가 되는 데 걸린 고작 7개월의 시간을 쫓아가며, ‘구성된 죄’의 전후를 살핀다. 장희빈에게서 300년 넘은 ‘악녀’ 꼬리표를 떼어낸 뒤, 그녀가 냉엄한 역사 현장에서 겨우 열 살 남짓한 아들의 미래를 기원했던 평범한 여자였음을 설명하기도 한다. 정난정, 정순왕후, 소혜왕후 등도 복잡다단하고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 섬세하게 재발견된다.
“여성이지만 ‘여성’을 넘어서야 했던 소혜왕후는 시시각각 모순된 상황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주장하면서 남성을 계도하여 정사를 행한 역사 속 여걸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자신의 책이 ‘민간의 우매한 여자들에게까지’ 널리 읽히기를 바라면서 그 내용은 주로 남성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서술은 학식과 정치적 감각을 두루 갖춘 이 여성 앞에 펼쳐진 세계 자체가 하나의 역할만을 고집하기에는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 아닐까.”_149~150쪽
역사는 ‘그들’로만 기록될 수도 있지만
세계는 ‘그들’만으로 구성될 수 없다
확장하고 진화하는 페미니즘과 백래시(backlash, 사회·정치적 변화에 반발하는 심리 및 행동)의 물결이 공존하는 오늘날, ‘공식적인’ 가부장제 사회에 각자의 방식으로 균열을 시도했던 여성들의 상처와 성취를 동시에 들여다보는 일은 더 의미 깊다. 3부 ‘닫힌 운명에 균열을 내다’에서는 주로 그 치열한 분투를, 4부 ‘시대의 틈에서 나를 꽃피우다’에서는 크고 작은 성취를 볼 수 있다. 성범죄 가해자를 직접 응징하고 자수한 김은애, 20세에 과부가 되어 늙고 가난한 시부모를 부양하던 중 ‘음란하다’는 헛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씨 부인, ‘열녀’가 당사자의 뜻이라기보다 다양한 시선에 의해 주문되고 제작됨을 보여주는 배천 조씨 등은 지금의 우리가 과연 그들로부터 얼마나 나아갔는지, 또는 얼마나 겹쳐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조정과 재야의 수많은 남자와 간통한 혐의로 투옥된 유감동이 지방으로 쫓겨나 종적을 감춘 데 비해, 그 많은 간부(奸夫)들은 시간이 지나자 슬금슬금 다시 요직으로 복귀해 나라를 이끌었다는 사실에선 결코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련한 처지의 박씨를 희롱하고 능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김조술, ‘정의란 무엇인가’를 던져 놓고 간 그의 죽음도 전혀 의미가 없진 않았던 셈이다. 이 역사적 사례를 통해 다시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2백 년 전 피해자 박씨가 그랬던 것처럼 성범죄 피해에서는 여전히 자기 파괴적으로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다. 성범죄 피해자의 명예는 죽어야만 회복되는 것인가. 죽어도 회복되지 않은 명예는 누구의 몫인가.”_238~239쪽
한편, 시대의 한계와 운명에 기꺼이 도전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가슴 벅찬 울림을 준다. 여자들의 외출이 엄격히 규제됐던 사회에서 ‘여행’에 승부를 건 두 여성, 남의유당과 김금원이 만들어낸 풍경들은 호쾌하고 통쾌하다. ‘밥이나 하고 옷이나 만들던’ 여자들의 일을 지식의 영역으로 체계화한 이빙허각, 당시 일반적이던 도피로서의 여성 불교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여성 불교의 힘을 보여준 이예순, 글과 시로 고통을 치유하고 존엄을 회복한 김호연재와 김삼의당 등은 강하고 명민한 여성들의 아름다운 성취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여자’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두 다르게 욕망하고 행동했던 52명을 통해 오늘의 독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미래를 고민하게 된다. 역사는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소외하는가. 한 사회를 성찰하고 그 속의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하나의 조선》이 존재했듯이 지금 이 순간 발견되지 않은 ‘또 하나의 한국’은 어디에 있을까.
“남의유당은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리 강했고 사람 사는 모습에 관심이 많았다. 여염집과 장터 구경은 물론 달 밝은 밤이면 망루에 올라 경관을 즐기는데, 마치 관내를 시찰하는 장수처럼 호방하게 굴다가 관아로 돌아오곤 한다. 방 안에 널려 있는 침선(針線) 거리를 보고서야 자신이 규방 여인이라는 사실에 박장대소한다.”_285쪽